대를 이은 스승들

SAYA THETGYI

1873-1945

사야지 우 바킨의 선생님의 다음 글은 미얀마의 Dhammacariya U Htay Hlaing이 쓴 "Saya Thetgyi" 책의 변역본에 부분적으로 기초한 것입니다.

Saya Thetgyi (버마어로 "Sa ya ta ji"로 발음)는 1873년 6월 27일 랑곤강의 반대편인 남랑곤에서 8마일 떨어진 Pyawbwegyi의 농가마을에서 태었습니다. 그는 Maung Po Thet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Po Thet 가 10살일 때 두 명의 형과 누나와 그를 포함하여 4명의 아이들 돌보는 것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녀는 마을에서 야채튀김을 팔아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작은 소년은 남은 튀김을 팔러 돌아다녀야 했는데 종종 아무것도 팔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 부끄러워 음식을 사라고 소리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엄마는 두명의 아이들을 함께 보냈습니다. Po Thet은 튀김을 담은 쟁반을 머리에 이고 날랐고 그의 여동생은 튀김을 사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에 정규 교육은 6년 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땅이나 논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논에서 추수가 끝난 후 남아있는 볏짚을 모았습니다. 어느날 논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Po Thet (포 텟)은 말라가는 못에서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마을에 있는 못에 물고기를 풀어주려고 물고기를 잡아 집으로 가져 갔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물고기를 보고 물고기를 잡아온 아들을 막 꾸짖으려 하는데 그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의도를 설명했습니다. 어머니는 오히려 "Sādhu (사두), sādhu (사두)! (잘 말했다, 잘했다)" 라고 외쳤습니다. 어머니는결코 잔소리를 하거나 야단치지 않는 친절한 여인이었지만 akusala (아쿠살라) (부도덕한) 행위는 참지 않았습니다.

Maung Po Thet은 14살이 되었을 때 쌀을 나르는 소달구지 마부로 일하기 시작했고 날마다 받는 일당을 엄마에게 드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는 너무 작아서 달구지로 들어가고 나갈 때 도움을 받기 위해 상자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Po Thet의 다음 직업은 작은 돛단배의 노를 젓는 것이었습니다. Pyawbwegyi의 마을은 평평한 경작지에 있었고 랑군 강으로 흘러 들어오는 많은 강을 통해 먹고 살았습니다. 논이 범람하면 항해가 문제가 되는데 여행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방법 중에 하나가 이 길고 바닥이 평평한 배였습니다.

지역의 정미소 주인이 쌀 가마니를 열심히 나르는 이 작은 소년을 지켜보고 한달에 6루피 임금을 주기로 하고 정미소의 검수인으로 고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Po thet은 정소미소에서 혼자 살았고 말린 완두콩 튀김이나 밥 같은 간단한 식사를 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인도의 경비원과 다른 노동자들로부터 쌀을 샀습니다. 그들은 돼지나 닭 먹이로 보관된 정미한 쌀의 찌꺼기를 쓸어 모으면 도움이 될거라고 말했습니다. Po Thet은 정미소 주인이 모르게 쌀을 갖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주인이 알고는 허락해 주었습니다. 마침내 Maung Po Thet은 쌀 찌꺼기를 오랫동안 먹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가 의욕적이고 도움 되는 일꾼이었기에 이내 돛단배와 소달구지의 주인들이 쌀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Po Thet은 그 찌꺼기를 계속해서 모았고 쌀을 살 형편이 안되는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1년 후에 그의 월급은 10루피로, 2년후에는 15루피로 올랐습니다. 정미소 주인은 그에게 좋은 쌀을 살 수 있는 돈을 주었고 그가 한달에 100통은 공짜로 정미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의 월급은 25루피로 올랐고 그돈은 그와 엄마의 생활을 지원하는데 충분했습니다.

Maung Po Thet는 16살 때 관습을 따라 Ma Hmyin과 결혼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부유한 지주이며 쌀을 파는 상인의 세 딸 중 막내였습니다. 그 부부는 딸과 아들 두 명의 자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버마의 관습에 따라 Ma Hmyin의 부모님과 언니들과 함께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작은 언니인 Ma Yin은 결혼하지 않았고 성공적인 작은 사업체를 경영했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U Po Thet 이 수행하며 명상을 가르치는데 중요한 후원자였습니다.

어렸을때 U Thet 은 버마에서 중요하고 일반적인 관습이었던 초보승이 되는 서품을 받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의 조카 Maung Nyunt이 12살의 나이에 초보승이 되었을때 U Thet도 초보승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또한 한동안 빅쿠로 계를 받았습니다.

23살이 되었을쯤에 그는 한 재가자 선생님인 Saya Nyun으로부터 아나빠나 명상을 배웠고 7년동안 명상수행을 계속했습니다.

U Thet과 그의 아내는 마을 가까이에 사는 많은 친구와 친척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삼촌, 이모들, 남자 조카들, 여자 조카들, 사촌들, 사돈들과 함께 그들은 가족들, 친구들과 조화롭고 따뜻함속에서 만족스러운 목가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1903년 콜레라 전염병이 마을에 퍼졌을때 이 소박한 평화와 행복은 산산조각났습니다. 마을사람들이 많이 죽었고 몇몇은 며칠만에 죽었습니다. U Thet의 아들과 어린 10대 딸도 죽었는데 어린 딸은 U Thet의 품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의 처남 Ko Kaye와 처남의 부인과 딸의 소꼽친구였던 조카딸 또한 그 병으로 죽었습니다.

이 재앙은 U Thet에 깊이 영향을 미쳤고 그는 어디에서도 피난처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절망적으로 이 불행을 벗어날 길을 찾기를 바라면서 그는 아내, 처제 Ma Yin, 다른 친척들에게 "불멸"을 찾기 위해 마을을 떠나도록 허락을 구했습니다.

헌신적인 여행 동반자이며 추종자였던 U Nyo와 함께 방황하면서 U Thet 은 절실하게 추구하면서 버마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산속의 수행처와 숲속의 승원들을 방문하여 스님들과 재가자들을 포함한 다양한 선생님들과 공부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첫 번째 스승이신 Saya Nyun의 제안을 따라 레디 사야도 스님과 수행하기 위해서 북쪽 모니와로 갔습니다.

영성을 추구하는 이 기간동안 U Thet의 아내와 처제는 Pyawbwegyi에 남아서 논을 경작했습니다. 처음 몇년동안 그는 모든 것이 괜찮은지 보기 위해서 가끔씩 돌아왔습니다. 가족들이 잘 살고 있는 것을 알고 그는 계속 명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7년 동안 레디 사야도와 머물렀고 이 기간 동안 그의 아내와 처제는 가족농장의 수확물로 번 돈을 해마다 보내주면서 그를 후원했습니다.

우 뇨 (U Nyo)와 함께 그는 마침내 마을로 돌아갔으나 이전의 재가자 삶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가 출발할 때 레디 샤야도는 그가 명상을 가르칠 수 있도록 사마디 (집중)와 빤냐 (정화하는 지혜)를 계발하기 위해 부지런히 수행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U Thet 과 U Nyo 가 Pyawbwegyi에 도착했을 때 가족농장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살라 (쉼터)로 바로 가서 그곳을 담마홀로 사용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쉬지않고 명상했습니다. 그들이 수행을 계속하는 동안 이웃에 사는 여자에게 하루에 두끼를 요리하도록 부탁했습니다.

U Thet은 1년 동안 이 방식으로 꾸준히 노력하여 그의 명상에서 급속히 진전했습니다. 이 기간이 끝날 무렵 그는 선생님의 충고를 필요다고 느꼈습니다. 비록 그가 레디 사야도에게 직접 말할 수 없었지만 그는 선생님의 책이 집의 찬장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안내서를 참고하기 위해 집에 갔습니다.

그 동안 그의 아내와 처제는 그렇게 오랜 시간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에 화가 많이 나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심지어 그와 이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자매들이 U Po Thet이 다가오는 것을 봤을때 그들은 환영하지도 인사하지도 말자고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문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들은 자신들이 아낌없이 그를 환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잠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U Thet은 그들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들은 쉽게 용서해주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차와 식사를 주었고 그는 책들을 찾았습니다. 그는 지금 8가지 계율을 지키고 있고 평범한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지금부터는 형제자매기 될거라고 아내에게 설명했습니다.

그의 아내와 처제는 매일 아침식사를 위해 집으로 오라고 초대했고 그를 계속 후원하는데 기꺼이 동의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관대함에 매우 감사했고 그들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담마를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아내의 사촌인 U Ba Soe를 포함하여 다른 친척들이 그 를 보고 대화하기 위해 왔습니다. 약 2주후에 U Thet은 점심을 먹으러 오고 가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Ma Hmyin과 Ma Yin은 점심을 살라로 보내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U Thet의 열의를 오해한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오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그가 자식을 잃은 것에 대한 큰 슬픔과 마을을 오랫동안 떠나있음으로 인해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그들은 그의 말과 행동을 보고 그가 진실로 변화된 사람, 담마와 부합하여 사는 사람이라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곧 U Thet의 친척들과 친구 중 일부가 명상을 가르쳐 달라고 그에게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U Ba Soe는 밭일과 가사일을 맡겠다는 제안을 했고 U Thet의 누나와 조카가 식사를 맡았습니다. 1914년 41살의 U Thet은 약 15명의 사람들에게 아나빠나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은 모두살라에 머물렀고 그들 중 일부는 가끔식 집에 갔습니다. 그는 명상 수행은 하지 않지만 흥미를 가지고 있는 학생들 뿐만 아니라 명상을 하는 학생들에게 법문을 했습니다. 청중은 그의 법문이 너무 박식해서 U Thet이 담마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을 아주 조금 갖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내와 처제가 재정적인 후원을 넉넉히 해줬고 다른 가족구성원의 도움으로 모든 음식과 필요물품들이 U Thet의 담마홀에 오는 명상가들에게 제공되었습니다. 한번은 그들이 위빳사나 코스를 하는 동안 노동자들이 손해볼 임금을 보상할 정도였습니다.

1년 동안 가르친 후 약 1915년에 U Thet은 그때 당시 약 70세였던 레디 샤야도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그의 아내, 처제, 다른 몇 명의 가족구성원들을 모니와로 데려갔습니다. U Thet이 자신의 명상경험과 그가 진행했던 코스에 대해서 선생님께 말씀드리자 레디 사야도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이 방문에서 레디 사야도는 그가 쓰던 보행용 지팡이를 U Thet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나의 훌륭한 제자여, 나의 지팡이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시오. 잘 보관하길 바랍니다. 당신이 오래 살라고 주는 게 아니라 상으로 주는 것입니다. 앞으로 당신의 삶에 실수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은 성공했습니다. 오늘부터 당신은 루빠(rūpa)나마(nama) (물질과 마음)에 관한 담마를 6천명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당신이 아는 담마는 고갈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사나(sasana) (붓다의 가르침이 퍼지는 시대)를 전파하십시오. 나 대신에 사사나(sasana)에 경의를 표하십시오.

다음날 레디 사야도는 그의 승원에 있는 모든 스님들을 불렀습니다. 그는 U Thet에게 10일 또는 15일동안 머물면서 그들을 가르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 사야도는 모인빅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 주목하시오. 이 재가자는 저지대 버마에서 온 나의 훌륭한 제자 U Po Thet 입니다. 그는 나처럼 명상을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명상을 수행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로부터 수행법을 배우고 수행하십시오. Dayaka Thet (스님에게 음식, 승복, 약 같은 필요물품을 공급하는 재가 후원자) 당신은 나를 대신하여 나의 사원에서 시작하여 담마의 승리 현수막을 거십시오."

U Thet은 그때 경전을 공부한 약 25명의 스님들에게 위빳사나 명상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Saya Thetgyyi로 알려진 계기가 이때였습니다. (saya는 선생님을 뜻하고 gyi는 존경을 나타내는 접미사입니다.)

레디 사야도는 Saya Thetgyi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담마를 가르치라고 격려했습니다. Saya Thetgyi은 레디 사야도가 쓴 많은 글을 암기하고 있었고 가장 많이 배운Sayadaws 사야도(스님 선생님들)도 잘못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경전을 참고하여 담마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대신하여 위빳사나를 가르쳐 달라는 레디 사야도의 간곡한 권고는 중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했지만 Saya Thetgyi 는 자신의 이론적인 지식의 부족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는 선생님께 깊은 존경심을 담아 절하며 말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 중에서 저는 경전을 가장 적게 배운 사람입니다. 선생님, 당신의 명을 따라 위빳사나를 가르쳐 사사나를 전파하는 것은 실행하기에는 매우 절묘하고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제가 명확함을 위해서 질문을 할 때 선생님께서 도움과 안내를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니 부디 저의 후원자가 되주시고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꾸짖어 주십시오."

레디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며 그를 안심시켰습니다 "나는 당신을 저버리지 않을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죽을 때에도"

Saya Thetgyi과 그의 친척들은 남쪽 버마에 있는 그들의 마을로 돌아가서 레디 사야도께서 주신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대한 계획을 다른 가족 구성원들과 의논했습니다. Saya Thetgyi는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방법으로 버마를 여행하는 것에 대해 심사숙고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처제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여기에 담마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학생들을 위한 음식을 준비해 주면서 당신을 도울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머물면서 코스를 진행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위빳사나를 배우기 위해 이곳에 올 것입니다." 그는 동의했고 Pyawbwegyi에 있는 그의 살라에서 정기적인 코스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처제가 예상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고 Saya Thetgyi 명성은 명상 선생님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는 빠알리 경전에 정통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단순한 농부들이나 노동자들도 가르쳤습니다. 그 마을은 영국의 지배아래 있는 버마의 수도 랑군에서 멀지 않았기에 공무원들과 우바킨 같은 도시 시민들도 왔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배우러 오자 Saya Thetgyi는 U Nyo, U Ba Soe, U Aung Nyunt 같은 나이가 많고 경험이 있는 명상가를 AT로 임명했습니다.

해가 갈수록 센터가 발전하여 코스에서 스님들과 비구니 스님들을 포함하여 200명의 학생까지 받았습니다. 담마홀에 충분한 방이 없어 더 경험이 있는 학생들은 집에서 명상하고 단지 법문을 들으러 살라에 왔습니다.

그가 레디 사야도의 센터에서 돌아온 이후로 Saya Thetgyi는 혼자 살았고 고독과 침묵속에서 하루에 한끼만 먹었습니다. 빅쿠처럼 그는 명상의 성취에 대해서 결코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질문을 받으면 그나 다른 학생이 어느 수준의 명상에 도달했는지 결코 말하지 않았지만 버마에서는 그를 아나가미 (최종 해탈 전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한 사람)라고 널리 믿었고 Anagam Saya Thetgyi로 알려졌습니다.

그 당시에는 위빳사나의 재가자 선생님이 드물었기에 Saya Thetgyi는 스님 선생님들이 직면하지 않았던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몇몇 사람들은 그가 경전을 많이 배우지 않았다는 이유를 그를 반대했습니다. Saya Thetgyi는 이러한 비판을 그저 무시하고 수행의 결과가 그들에게 스스로 말하도록 하였습니다.

30년동안 그는 레디 사야도의 안내서를 참고서로 사용하여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서 그에게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명상을 가르쳤습니다. 1945년 72살이 되었을 때 그는 수천명을 가르치는 그의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죽었고 처제는 마비가 되었고 그 자신의 몸은 쇠약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담마홀의 유지를 위한 50 에이커 논을 따로 떼어 놓고 모든 재산을 남녀 조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는 수년동안 그의 밭을 경작했던 20마리의 물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물소들을 잘 대해줄 것이라고 아는 사람들에게 물소들을 나눠주며 이렇게 축원했습니다. "너희들은 나의 은인이었다. 너희들 덕분에 쌀이 잘 자랄수 있었다. 이제 너희들은 일에서 벗어났다. 이런 삶에서 벗어나 더 나은 존재가 되기를"

Saya Thetgyi는 의학적인 치료와 랑군에 사는 그의 학생들을 보기 위해서 랑군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는 몇몇의 학생들에게 그가 랑군에서 죽을 것이고 전에 화장을 하지 않았던 장소에서 그의 몸을 화장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오염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즉 자신이 아라한 (완전히 깨달은 존재)가 아니기에 그의 재를 신성한 장소에 보관해서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학생중에 한명이쉐다곤 파고다의 북쪽의 경사지에 있는 Arzanigone에 명상센터를 설립했습니다. 근처에는 세계 2차대전동안에 만들어진 방공호가 있었습니다. Saya Thetgyi는 이 방공호를 명상 동굴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밤에 AT 중 한명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회계 과장 우바킨과 소득세 위원회인 U San Thein를 포함하여 랑군에서 사는 그의 학생들은 시간히 될 때마다 그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그를 보러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수행하고 명상 수행을 하러오는 모든 비구 스님과 비구니 스님들을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며, 몸, 말, 마음을 잘 훈련시키고, 그들이 한 모든 것에 대해서 붓다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Saya Thetgyi는 매일 저녁 쉐다곤 파고다에 가곤 했는데 약 1주일 후에 방공호에 앉아있다 감기에 걸려 열이 났습니다. 의사의 치료를 받았음에는 불구하고 그의 상태는 악화되었습니다. 그의 상태가 악화되자 그의 조카들이 Pyawbwegyi에서 랑군으로 왔습니다. 매일 밤 약 50여명의 그의 학생들이 명상하면서 함께 앉았습니다. 이 단체명상 동안 Saya Thetgyi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조용히 명상하셨습니다.

어느날 밤 10시경쯤 Saya Thetgyi는 몇몇 학생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우바킨은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등을 대고 누었고 그의 호흡은 커졌고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두명의 학생은 집중해서 지켜봤고 나머지 학생들은 조용히 명상했습니다. 정확히 오후 11시에 그의 호흡은 더 깊어졌습니다. 마치 들숨과 날숨이 각각 5분정도 걸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세 번 호흡 후에 숨이 완전히 멈추었고 Saya Thetgyi는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시신은 쉐다곤 파고다 북쪽의 비탈지에서 화장되었고 사야지 우바킨과 그의 제자들은 나중에 그 지점에 작은 파고다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이 위대한 선생님에게 가장 적합하고 오래가는 기념비는 레디 사야도가 그에게 준 임무, 담마를 모든 사회 계층에 전파하는 것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