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째날 법문

수행법 검토

10일이 지났습니다. 이 10일동안 여러분이 무엇을 했는지 살펴봅시다. 여러분은 삼보 즉 붓다, 담마, 상가에 귀의함으로써 명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이 하나의 조직된 종교에서 또다른 종교로 개종한 것은 아닙니다. 위빳사나에서 개종은 오직 불행에서 행복으로, 무지에서 지혜로, 속박에서 자유로의 개종뿐입니다. 모든 가르침은 보편적입니다. 여러분은 한 개인, 교리, 종파가 아니라 깨달음의 특성에 귀의했습니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발견한 사람은 붓다입니다. 그가 발견한 방법은 담마라고 합니다. 이 길을 수행하고 성인의 단계에 도달한 모든 사람은 상가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받은 사람은 마음의 정화라는 똑같은 목표에 이르기 위해 붓다, 담마, 상가에 귀의합니다. 자신안에서 계발하기를 원하는 깨달음이라는 보편적인 특성에 귀의합니다.

동시에 이 길에서 발전하는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이 일어나고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려는 의도가 생길 것입니다. 이러한 두가지 자질은 역사적인 붓다인 Siddhattha Gotama에게 중요했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그 자신의 노력으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존재에 대한 연민으로 그가 발견한 이 수행법을 다른사람에게 가르치기를 원했습니다.

이 명상법을 수행하고 자기중심적인 오랜 습관을 어느 정도 제거한 사람들에게 같은 특성이 나타날 것입니다. 진정한 피난처, 진정한 보호는 여러분이 자신 안에서 계발시키는 담마입니다. 그러나 담마의 경험과 함께 이 수행법을 찾아내고 가르쳐 준 고타마 붓다에 대한 감사함이 커집니다. 또한 지금까지 25세기동안 원래의 순수함으로 가르침을 유지하기 위해 사심없이 노력한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도 커집니다.

이것을 이해하면서 여러분은 삼보에 귀의했습니다.

다음에 여러분은 5가지 계율을 지키기로 서약했습니다. 이것은 의식이나 의례가 아닙니다. 이 계율을 받아들이고 지키면서 여러분은 수행법의 기초인 실라, 도덕성을 수행했습니다. 강한 기초가 없으면 명상의 전체 구조가 약해집니다. 실라는 또한 보편적이고 종파와 관련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의 평화와 조화를 방해하는 모든 행위, 몸이나 말로 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러한 계율을 어기는 사람은 먼저 마음안에 큰 불순물을 일으켜서 자신의 평화와 조화를 파괴합니다. 마음에서 불순물이 일어나 말이나 몸으로 그 불순물을 표현합니다. 위빳사나에서 여러분은 마음을 정화하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마음은 참으로 고요해지고 평화롭게 됩니다. 여러분이 여전히 마음을 더럽히고 뒤흔드는 행동을 계속하면 마음을 정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요된 마음이 불건전한 행동을 해서 마음을 더 동요시키는 악순환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위빳사나 코스가 여러분에게 기회를 줍니다. 빡빡한 프로그램, 엄격한 규율, 침묵하는 서약, 강하게 뒷받쳐주는 분위기 때문에 여러분이 다섯 계율을 어길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10일 동안 여러분은 실라를 수행할 수 있고, 실라를 바탕으로 사마디를 계발할 수 있습니다. 사마디는 통찰의 바탕이 되고 여러분은 이 통찰력으로 마음의 깊은 곳으로 꿰뚫고 들어가 마음을 정화할 수 있습니다.

코스 중에 여러분은 이 수행법을 배울 수 있도록 5 가지 계율을 지키기로 약속했습니다. 이 수행법을 배운 뒤, 담마를 받아들여서 수행하려고 결정한 사람은 이 계율을 평생 지켜야 합니다.

다음에 여러분은 코스를 하는 10일 동안 붓다와 현재의 지도선생님께 자신을 내맡겼습니다. 이러한 내맡김은 이 수행법을 공정하게 시도해 보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내맡긴 사람만이 최대한의 노력을 발휘하며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의심과 회의적인 태도로 가득한 사람은 제대로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맡김이 맹목적인 믿음을 개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맹목적인 믿음은 담마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에 의심이 생겼다면 설명이 필요한 만큼 자주 지도 선생님에게 올 수 있습니다.

규율과 코스 시간표에도 자신을 내맡겨야 합니다. 그것들은 수천명의 이전 학생들이 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었고 10일동안 여러분이 최대한의 이익을 얻기 위해 꾸준히 수행할 수 있게 합니다.

내맡김으로써 당신은 가르치는 그대로 수행할 것에 동의했습니다. 여러분이 이전에 했던 수행법은 코스를 하는 동안 중지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올바른 방법으로 이 수행법만을 연습할 때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이 수행법에 대해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혼합된 수행법은 여러분에게 심각한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런 후 마음 다스리기, 집중 사마디를 계발하기 위한 아나빠나 명상을 훈련함으로써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단어, 모양, 형태를 추가하지 말고 그저 자연스러운 호흡만을 관찰하라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제한하는 한 가지 이유는 수행법의 보편성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호흡은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단어나 형태는 누구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다른 사람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저 호흡만을 관찰하는 데는 더 중요한 까닭이 있습니다. 모든 과정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자신 즉, 마음-물질 구조에 대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탐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상에 대한 조사입니다. 여러분은 앉아서 눈을 감습니다. 소리도, 외부의 방해도, 몸의 움직임도 없습니다. 그 순간 여러분 자신안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호흡입니다. 여러분은 이 실상 즉 자연스러운 숨이 콧구멍으로 들어가고 나가는 대로 관찰함으로써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호흡을 느낄 수 없을 때 콧구멍 부분에 주의를 고정시키고 약각 세게 호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나서 다시 자연스러운 보통의 부드러운 호흡으로 돌아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거칠고 겉으로 드러나는 실상과 함께 시작했고 거기서부터 더 나아가, 가녀린 실상, 궁극적인 실상으로 더 깊이 들어갑니다. 온 과정에서 여러분은 가장 거친 것에서부터 가장 가녀린 것까지 매 순간 여러분이 실제로 경험하는 진리와 함께 합니다. 여러분은 상상력으로 시작해서는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더 큰 상상, 자기 기만에 휘말리게 될 뿐입니다.

여러분이 호흡이라는 대상에 단어를 덧붙인다면 마음을 좀 더 빠르게 집중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위험이 있습니다. 모든 단어는 특정한 진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어나 어구를 반복함으로써 인위적인 진동을 만들수 있고 여러분은 그 진동에 파묻힙니다. 마음의 표면적인 차원에는 평화와 조화의 층이 만들어지지만 깊은 곳에는 불순물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깊은 곳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들을 어떻게 관찰하는지, 그것들을 어떻게 표면으로 가져와 사라지게 하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특정하고 인위적인 진동만 관찰한다면 자신의 불순물과 관련된 다양한 자연적인 진동, 즉 몸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감각을 관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목적이 자신의 실상을 탐구하고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라면 상상의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장애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시각화, 즉 마음 속에 모양이나 형태를 그리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수행법은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겉으로 보이는 진리를 녹여나갑니다. 겉으로 드러나고, 통합된 진리는 항상 환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는 과거의 반응에 의해 왜곡된 산냐(saññā), 인식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조건화된 인식은 구별하고 차별해서 편견과 선호도를 생기게 하여 새로운 반응을 만듭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실상을 분해함으로써 여러분은 차츰 마음-몸 구조의 궁극적 실상, 즉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진동을 경험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어떤 구별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선호도 편견도 일어날 수 없고 반응도 없습니다. 이 수행법은 조건화된 산냐(saññā)를 차츰 약하게 만들고, 따라서 반응도 약하게 만들어 인식과 감각이 멈추는 단계, 즉 닙바나(nibbāna)의 경험으로 이끌어줍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모양, 형태, 환상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겉으로 드러나고, 합성된 실상에 머무르고 그 이상 발전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각화나 언어화를 해서는 안됩니다.

자연스러운 호흡을 관찰하면서 마음을 집중한 뒤 빤냐(paññā), 마음을 정화하고 자신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지혜, 통찰을 계발하기 위해 여러분은 위빳사나 명상을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몸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런 감각을 관찰하고, 표면에서 시작하여 더 깊은 곳으로 가면서, 몸 안팎 곳곳에 있는 감각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진리를 해체시키고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떤 선입견도 없이 실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위빳사나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진리를 해체시키는 목적은 명상가로 하여금 "나"라는 환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 환상은 모든 갈망과 혐오의 뿌리이며 큰 괴로움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사람들은 지식으로 이것은 환상이다라고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이러한 받아들임이 괴로움을 끝내는 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믿음과는 상관없이 자기중심적인 습관이 지속되는 한 여러분은 계속 불행합니다. 이러한 습관을 깨기 위해서는 마음-몸 현상의 실상, 즉 당신의 통제를 벗어나 끊임없이 변화하는 본성을 직접 경험해야 합니다. 이러한 경험만이 자기중심주의를 녹이고, 갈망과 혐오에서 벗어나도록,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줍니다.

그러므로 이 수행법은 우리가 "나, 내것" 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참된 실상을 직접 경험하여 탐구하는 것입니다. 이 현상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물리적인 측면과 마음에 관한 측면, 몸과 마음입니다. 명상가는 몸의 실상을 관찰하면서 시작합니다. 이 실상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몸을 느껴야 합니다. 즉, 온몸에서 감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몸의 관찰인 까야누빳사나(kāyānupassanā)는 필연적으로 감각의 관찰인 웨다나누빳사나(vedanānupassanā)와 관련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과 분리해서 마음의 실상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의 관찰인 찟따누빳사나(cittānupassanā)는 필연적으로 마음의 내용물 관찰인 담마누빳사나(dhammānupassanā)와 관련있습니다.

이는 생각을 일일이 관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생각속에서 헤맬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순간에 그저 마음의 성질을 계속 알아차려야합니다. 갈망, 혐오감, 무지, 동요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 물리적인 감각이 따라온다는 것을 붓다가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명상가가 "나"라는 현상의 정신적인 측면을 살펴보든, 육체적인 측면을 살펴보든, 감각의 알아차림이 필수입니다.

이러한 발견은 붓다가 독특하게 공헌한 것이며 그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붓다 이전과 붓다 당시의 인도에서 실라사마디를 수행하고 가르쳤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빤냐 또한 있었지만 헌신적인 지혜 또는 지적인 지혜였습니다. 마음의 번뇌가 괴로움의 근원이며 마음을 정화하고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갈망과 혐오를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붓다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감각이 중요하다는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지금처럼 그 때도 우리가 하는 반응은 감각의 외부 대상(볼거리, 소리, 냄새, 맛, 만질거리, 생각들)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진리에 대한 관찰은 대상과 반응 사이에 있는 연결고리를 놓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각각의 감각 기관과 그에 대응하는 대상과의 접촉은 감각을 일으킵니다. 산냐(saññā)는 일어나는 감각이 유쾌하냐 불쾌하냐에 따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여러분은 갈망이나 혐오로 반응합니다. 그 과정은 아주 빠르게 일어나서, 반응이 수차례 반복된 후에라야 의식적인 알아차림이 계발되고 그 과정은 마음을 압도할 만큼 충분히 위험한 힘을 모읍니다. 이 반응을 다루기 위해서는 반응이 시작하는 시점에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반응은 감각과 함께 시작하니 우리는 감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붓다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이러한 사실을 발견하고 싯닷타 고타마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때문에 붓다는 항상 감각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감각은 갈망과 혐오의 반응으로 이끌 수 있고 그래서 괴로움으로 이끌지만, 감각은 반응을 멈추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지혜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위빳사나에서는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수행도 해롭습니다. 단어나 형태에 집중하거나, 단순히 몸의 물리적인 움직임이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해롭습니다. 여러분은 괴로움의 근원인 감각으로 감각으로 가지 않는 한 괴로움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붓다는 사띠빳타나 숫따(Satipaṭṭhāna Sutta), "깨달음의 확립에 대한 법문"에서 위빳사나 수행법을 설명했습니다. 이 법문은 수행법의 다양한 측면을 검토하는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몸의 관찰, 감각의 관찰, 마음의 관찰, 마음 내용의 관찰입니다. 그러나 각 부분이나 세분화된 부분은 같은 말로 마무리됩니다. 수행을 시작하는 점은 다르지만 출발점이 다르더라도 명상가는 마지막 목표로 가는 길에서 어떤 정류장, 어떤 경험을 거쳐야 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에서 필수적인 이러한 경험들은 각 부분의 결론에서 반복되는 문장으로 설명합니다.

그러한 첫 번째 정류장에서 일어남 (samudaya (사무다야))과 사라짐(vaya (와야))을 따로 경험합니다. 이 단계에서 명상가는 몸 안에서 거친 감각의 형태로 굳어있고 통합된 실상을 알아차립니다. 아픔 같은 감각이 일어남을 알아차립니다. 감각은 얼마동안 머물는 것처럼 보이다가 결국 사라집니다.

이 정류장을 넘어 더 깊이 가면 samudaya-vaya (사무다야-와야)의 단계로 꿰뚫고 들어가, 어떤 간격도 없이 일어남과 사라짐을 동시에 경험합니다. 거칠고 굳어있는 감각은 가녀린 진동으로 분해되어, 빠른 속도로 일어났다 사라지고, 마음-몸 구조의 단단함이 사라집니다. 굳어있고 강한 감정과 굳어있고 강한 감각이 둘다 진동으로 분해됩니다. 이것이 bhanga (방가), 녹음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마음과 물질의 궁극적인 진리 즉 어떠한 단단함도 없이 계속 일어나서 사라짐을 경험합니다.

이 방가(bhanga)는 이길에서 매우 중요한 정류장입니다. 마음-몸 구조의 용해를 경험할 때만 마음-몸 구조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즉 상카라-우뻭카(saṅkhārā-upekkhā)의 단계에 들어갑니다. 무의식속에 파묻혀 매우 깊이 숨어있는 불순물인 상카라가 이제 마음의 표면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퇴보가 아니라 발전입니다. 불순물이 표면으로 나오지 않으면 불순물을 제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카라가 일어나고 여러분이 평정심을 가지고 관찰하면 상카라가 차례대로 사라집니다. 거칠고 불쾌한 감각들을 도구로 사용하여 오랫동안 쌓인 혐오의 상카라를 제거합니다. 가녀리고 유쾌한 감각들을 도구로 사용하여 오랫동안 쌓인 갈망의 상카라를 제거합니다. 그래서 모든 경험에 대해 알아차림과 평정심을 유지함으로써 깊이 깔린 열등감으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키고 자유, 닙바나(nibbāna)라는 목표에 더욱 더 가깝게 다가갑니다.

출발점이 어디이든 닙바나(nibbāna)에 도달하기 위해 이러한 모든 정류장을 거쳐야 합니다. 얼마나 빨리 목표에 도달하는가는 얼마나 많이 수행하는지, 축적된 과거에 축적된 상카라가 얼마나 많은지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나 모든 경우와 모든 상황에서 감각의 알아차림을 바탕으로 한 평정심이 가장 중요합니다. 상카라는 육체적인 감각에서 일어납니다. 감각에 대해 평정심을 유지함으로써 새로운 상카라가 일어나지 않게 하고 또한 오래된 상카라를 제거합니다. 그러므로 평정심을 가지고 감각을 관찰함으로써 괴로움에서 자유롭게 되는 최종 목표를 향해 조금씩 나아갑니다.

진지하게 수행하십시오.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으면서 이런 저런 수행법을 가볍게 시도하면서 명상을 놀이로 하지 마세요. 그렇게 한다면 어떤 수행법도 초기 단계를 넘어 나아가지 못할 것이고 그래서 여러분은 결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적합한 수행법을 찾기 위해 다른 수행법들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이 수행법을 두세 번 시도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도만 하면서 여러분의 온 삶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적절한 수행법을 찾으면 마지막 목표로 나아가도록 진지하게 수행하십시오.

곳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불행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기를.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